지금 시간은 견디어내는 것일뿐

2008/06/27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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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2. 우음도
Canon EOS 5D with 17-35mm 2.8 L



정신과 선배와 전화 통화를 했고, 그는 나에게 우울증 증상이 있다고 했다. 새삼 놀랄 것도 없다. 질환은 진단이 내려진 순간부터 표면화되어 기정 사실이 되는 것뿐, 그 이전부터 있는 것이다. 우울의 증상이 있음을 나 스스로 자각하고 있는데, 정신과 의사가 우울증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 놀랄 이유는 없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상실감, 공허함, 그리고 그로 인한 우울함. 우울증으로 인한 사회적 능력의 저하, 이런 것들을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지 않은가. 더욱이 나는 이 우울의 원인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원인을 안다고 해서 해결책을 안다는 것과 동의는 아니다.


감기가 낫는데 어떻게든 2주일의 시간이 걸리듯, 우울한 기분을 견디어 내는데에는 그 이상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어떠한 방법으로도 이 감정이 사라지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다. 지금의 시간은 견디어내는 것 뿐이다. 우울한 마음이 사라지고, 어느 정도 마음의 평정이 돌아올때까지, 그래서 몇 달 전의 내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 때까지. 쉽지 않을 수도 있고 괴롭고 힘들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 이외에는 다른 해결책이 없다. 그러기에 견디어내야만 하는 것이다.

지난 몇 주 동안 나는 평소의 나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야 했다. 무엇보다 마음이 힘들어서 일에 집중 할 수 없었고, 또 사람들을 본의 아니게 피하게 되었다. 결국에는 생전 내가 한 번도 하지 않은 실수를 저질렀고, 그 실수에 대한 평가가 사람들 사이에서 엇갈리기는 하지만 - 잘 했다와 잘 못했다는 - 나 스스로도 반성을 하고 있다. 나 개인으로는 충분히 그러할 수 있었지만, 책임을 지고 있는 직장인으로서는 그러지 말았어야 한다. 여튼 힘든 시간을 예전처럼 똑같이 아무렇지 않은듯 지내야 하고,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나이 서른을 먹은 성인으로서 그 정도의 책임은 따르는 법.

정신과 선배의 몇 가지 충고와 더불어 나 스스로가 처방을 내리기로 마음먹었다. 이 시간들을 이겨내면서 내가 시켜야할 수칙들.



첫째, 무엇보다도 인간 관계나 사회 관계 내에서 회피 withdrawal 하지 말 것. 내가 힘들다고 해서 일상적으로 영위해오던 인간 관계와 생활을 깨뜨리면 안된다. 더욱이 의사는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이고, 그렇기 때문에 항상 나는 기분이 좋을 필요가 있다. 환자 앞에서 찡그리고 쳐진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 마찬가지로 수술방 간호사, 병동 간호사, 그리고 동료 의사들에게까지, 내 괴로움을 보란듯이 내보여서는 안된다. 회피는 더욱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오늘 우연히 다른과 주임 교수님을 만났는데, '어이 박선생, 요즘 얼굴 좋아보이네. 좋은 일 있나?' 라는 말을 들었다. 속으로는 아닌데요, 반대인데요, 정말 안 좋은데 일부로 웃고 있는건데요, 라고 말했지만 겉으로는 다시 한 번 웃었다. 아, 나도 내 우울함을 숨길 수 있구나, 최소한 다른 사람들 눈에는 띄지 않게, 그래서 내 우울이 전염되지 않게 할 수는 있구나 하고 나 스스로를 대견하게 생각했다.



둘째. 부정적 인식 negative cognition을 하지 말 것. 나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생각을 중단 stop thinking 할 것. 늦은 밤 혼자서 반추하면 할수록 결론은 부정적이고 미움만 생겨날뿐. 더 이상 그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사건은 이미 발생하였고, 더 생각한다고 해서 새로운 해석이 나오지도, 상황이 정반대로 바뀌지도 않는다. 그의 행동, 그의 말 모든 것에 더 이상의 해석은 하지 않는다. 이 부정적 인식은 그에 대한 것뿐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생각에도 적용된다. 내 자신에 대해서도 어떠한 비하나 자존감을 잃는 생각은 철저하게 버릴 것.



셋째, 어쨌든 나 자신은 그래도 쓸모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 짧은 순간이나마 가장 소중했던 것을 잃어버리고, 나는 무능하고 매력이 없으며 나약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더라도, 그래도 세상 한 편에는 나를 좋아해주고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늘 기억할 것. 이를테면, 1년전에 수술받고 퇴원한 환자가 굳이 다시 찾아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갈때, 세상에는 나를 받아줄 자리를 허락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또 한 편에는 나를 생명의 은인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구나 하며 안도를 하게 된다. 1년전에 죽을 고생을 하고 퇴원한 환자와 보호자들이 일부러 지방에서 올라와 찾아온 일은,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눈물나게 고마운 일이었다. 나보고, 쓰러지지 말라고, 일부러 찾아온 것만 같아서.



넷째, 변하지 말 것. 때로는 우울한 감정을 극복하기 위해서 나 자신이 변하려고 마음먹을때가 있다. 머리를 짧게 자른다던지, 예전에 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들을 시작한다던지. 평상시 나 자신이 나 자신 스스로 부자유스럽게 만드는 인간 관계를 좋은 관계가 아니듯, 우울과 시련을 변화로 바꾸어나가려는 것 또한 좋은 대처 방법은 아니다. 예전 그대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할 것.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는 내 일상적인 모습에서부터, 그에 대한 나의 생각 또한 포함된다. 그에 대한 나의 호감과 생각을 변하게 하지 말 것.



다섯째. 몰입할 대상을 찾을 것. 빈 시간을 만들어 떠오로는 생각에 괴로워하지 말고, 몸과 마음이 지칠 만한 일을 찾을 것. 그동안 꼭 해야 했고 혹은 하고 싶었던 일이지만 미루었던 일들에 전념할 것. 진작에 써야했을 논문, 그리고 작년부터 새로 시작하려했던 몇 가지 사진 기법들, 정리하려고 마음먹은 수천장의 사진들과 여행기들, 그리고 운동까지. 빈 시간을 채우고, 그 시간에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그로 인해 공허함을 잊을 것. (이제서야 블로그에 사진이나 여행기가 올라오는 빈도가 늘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충동적인 관계나 관심을 버릴 것. 상실을 메우기 위해 다른 대상을 찾지 말 것. 그것이 사람 (그를 대체한다고 생각하는) 이건 물건이건. 충동적인 구매는 더욱 공허하게 만들 뿐이다. 대신할 누군가를 찾는건, 새로운 대상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적어도 내가 정리된 후에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





처방전이 주어졌으니, 이제는 처방전을 잘 따르는 환자가 되어야겠지? 무엇보다도 지금 시간은 견디어내는 것 뿐이다. 지금같은 이유의 아픔과 우울함은 이제 마지막이 되어야겠지만, 살다보면 더욱 슬프고 괴로운 일들이 생길테고, 그 시간들을 위한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그런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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