備忘錄 III

2006/04/30 01:21

 

備忘錄 III


오 내 피, 오 내 아가를 언 땅에 묻은 뒤, 흰 보자기로 뜰 아래 흙을 퍼담아 낮에 쓰다듬고 밤으로는 가슴에 껴안고 젖물리는 女人. 젖 무덤 흰 가슴에 매일 흩어지는 흙, 鐵門의 病室, 病名이 붙은 變身의 母性愛.

나는 오랜 不眠끝에 옹크린 잠이 들면 꿈에는 죽은 친구를 만나서 반갑고, 골목길 술집에서 같이 찬 술을 들이키다가 잠이 깨면 아직 남아있는 뼈아픈 宿醉, 막막한 높이의 暴雪, 내가 몇해만에 仁川에 갔을때도 바닷물은 내게와서 말해 주었지, 친구여 소리없는 時間에 到着하여 잔잔히 溶解되어라.

지금은 언 땅에 非常이 내리고, 목이 긴 軍靴로 下宿집에 들어서면, 냉돌에 밤 기차소리 흔들리고 내가 지켜본 많은 죽은 이들 하나 둘 모이기 始作하네. 밤새 내리는 體溫. 아침결이 되면 내 가슴에도 문득 남아있는 흙. 아 손 위에 넉넉한 平和여.


- 마종기, 평균율



마종기 시인이 젊은 시절, 황동규, 김영태 시인과 함께 출판한 '평균율'에 실린 시. 마종기 시 전집이 나오기 이전, 먼지에 쌓인 이 시집을 대학 중앙 도서관 서지에서 발견하고 뒤척이다 '뜰 아래 흙을 퍼담아 낮에 쓰다듬고 밤으로는 가슴에 껴안고 젖물리는 女人. 젖 무덤 흰 가슴에 매일 흩어지는 흙'이라는 표현에 얼마나 충격을 받았던지. 시적인 전후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아이를 잃은 모성의 아픔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어, 아이를 잃고 추운 겨울 언 땅 위에서 울고 있는 여인의 이미지가 며칠 동안이나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던 기억이 든다.

시인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근무하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하여 도미, 미국에서 의사 생활 후 이제는 다시 귀국하여 생활하고 있다. 학생때 의학과 문학이라는 주제의 심포지엄 때 먼발치에서 지켜본 적이 있는 정도, 지금은 강단에서 조그만 교양과목을 강의하고 계신 걸로 알고 있는데, 그 강의를 들을 수 있는 후배들이 늘 부러울 뿐이다.
시인의 시는 너무 현실적이고 또 시인의 생활과 개인사와 밀접하여 읽히기 쉬운 반면 또 너무 쉽게 읽혀 거부감이 들때도 있지만, 쉽게 쉽게 공감가는 시를 쓰는 것 또한 詩作의 일가라고 한다면, 시인은 이미 시를 쓰는 법에 통달한 사람일테다.

의과대학 시절, 그리고 의사 시절 죽어가는 환자와 해부 실습 등의 경험을 담은 서정성 높은 시들은 아름답다는 표현 말고는 달리 표현하기가 어렵다. 시가 치유의 능력이 있다면, 시인과 독자 모두에게, 시인과 나는 같은 시를 통해서 비슷한 치유의 경험을 가졌다. 그래서 늘 동경하고 관심을 가지고 있는 시인 중 하나이다.

문득, 그의 초기 시 '備忘錄 III'이 생각나 책장을 뒤적이다 적어보다.
2006/04/30 01:21 2006/04/30 01:21
by 박성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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