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격
2009/05/13 22:57
지난주 토요일, 밤 11시에 퇴근해서 새벽 1시쯤 자려고 누웠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번호는 보니 병원 대표전화, 걸은 사람은 응급실 내과 당직 레지던트. 선생님, 예전에 식도암 수술받은 환자인데, 오른쪽 폐에 기흉이 있고 산소포화도가 85%밖에 안 되요. 순간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 수술에서 우측 개흉술을 했을테고 분명 유착이 있고 기흉이 생겨도 아주 일부일텐데 산소포화도가 그정도 밖에 안 된다고? 여튼 그 얘길듣고 병원에 안 나가볼 수 없으니 옷을 갈아입고 병원에 나갔다. 예상대로 산소포화도는 85%가 아니었고, 기흉은 국소적이었지만 흉관을 넣는 편이 나을꺼라는 판단이 들어 간단히 시술을 시행했다. 그런데 기흉이 있을당시 X-ray를 보니 밤 10시 찍은 사진이었다. 아니 그럼, 밤 10시에 찍은 사진을 가지고 새벽 1시에 확인하고 퇴근한 전문의를 불러내는 레지던트가 있단 말인가. 10시에 바로 확인만 했으면 퇴근했다가 새벽에 다시 병원에 나오는 일은 없었을텐데. 예전 같았으면 분명 그 레지던트를 불러 넣고 혼냈을텐데, 그냥 아무말말고 조용히 넘어가자 싶었다.
아무래도 아직은 지금 직장이 친정, 아니면 모교가 아니라는 생각에 행동 하나 말 하나하나에도 조심하게 된다. 누군가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것도 눈치를 보게 되고 한번 더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요즘들어 '화를 낸다'는 것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된다. 인턴들도 시킨 일 참 못 미덥게 하고, 중환자실 간호사, 병동 간호사들도 지적할 부분들이 많다. 잔소리쟁이 시어머니처럼 화내고 다 말하고 다닐수도 있지만, 요즘은 화내기 전에 나는 그럼 어떤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남의 잘못을 지적하고 다니지만, 나 역시 위에 선생님들이 보면 부족한 부분이 많아 지적받고 또 혼나기도 한다. 나 역시 부끄러운 부분이 많은 사람은데 과연 다른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병원에서 보면, 누군가가 잘못했을때 그 사람에게 화를 내는 것은 결국 화내는 사람 자신의 자신감의 부족이나 능력의 부족을 보여주는게 아닌가 싶다. 물론 치명적인 잘못을 한 사람은 따끔하게 지적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 사소한 일에도 화를 내는 것은, 화 내는 사람이 어떤 일그러진 상황에 대해서 통제를 하지 못하고, 통제할 능력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예전에 한 교수님은 아랫사람들이 어떤 실수를 할지까지도 미리 파악하고 일을 시켜야 한다고 얘기해주신적이 있는데 같은 맥락일 것이다. 아랫 사람이나 다른 paramedicine들이 능력이 부족하다면 내가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다는 의미이고, 결국 처음부터 내가 상황을 통제하게끔 만들었어야 한다.
또 어떤 선생님은 '화를 낸다'는건 결국 인격의 문제라고 한다. 정작 따지고 보면 그리 화 낼일이 많은 것도 아니고 또 문제가 생긴다한들 문제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 겸허한 의사의 자세일 것이다. 항상 예상과 기대대로 100% 완벽한 상황만이 전개될꺼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니, 결국은 상황을 받아들이고 앞으로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침착함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이다.
나름 속터지는 일들이 많지만 이런 식으로라도 참고 승화시켜야지 --;
P.S.
그날 밤 응급실에서 화를 안 낸 결정적인 이유는.... 뭐 내 생리를 잘 아시는 분들은 쉽게 짐작하실듯.

화를 내지 않으면 비슷한 일이 반복될 수도 있다는...
요즘 화내면 적정진료실에서도 연락오고 전공의협의회에서도 연락오고 해서 --a
감정을 자제하고 사람을 혼낸다는 것은 참 어려운듯...
주말에 꼭 몸보신해야겠어요.. 온 몸이 아파서 ㅜ.ㅜ
저도 최근 비슷한 상황을 겪으면서 정말 사소한 부분에 대해 어디서 부터 어떻게 지도? 해야하는건지, 잔소리 쟁이가 되지 않으려다가 홧병으로 죽을지도 모른다는,,,제 마음을 다스리기 벅찬 요즘입니다.*^^*
그러면 안 되는데 전 대부분의 경우 그냥 안 가르치고 넘어가곤 합니다.. 배우는 사람도 자세가 되어야 하는데 안 그런 경우가 많아서.. 모르면 결국 자기 손해라는.. 굳이 자세가 안 된 사람을 억지로 가르쳐가면서 싫은 소리를 들을 이유는 없으니...
새벽 1시에ㅠ_ㅠ 선생님 고생이 많으세요.힘내세요..
그냥 내 인생이 뭐 이렇죠...
승화가 되면 인격자가 되는 것이고, 승화가 안 되면 환자가 될지도 몰라요...-.-;
가끔 화도 내야 되겠죠...^^
승화시키려고 노력중입니다 :-)
화를 안내신 결정적인 이유는...음... 잘 알겠습니다...
역시 내 후배...
Administrator only.
많이 불쌍한게 맞는거 같아요.. 정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흠...
Administrator only.
너라도 혼내야 후배들이 배우면서 자라지 않을까?
바쁘시겠지만 <데일카네기 인간관계론>을 한번 읽어보세요, 전 많은 영감을 얻었습니다. 화를 낸다면 그 이유가 정당할지라도 그 사람과는 적이 될 수 밖에 없지요.
스스로 깨우치도록 해야하는데 참 어렵지요.. 너무 참으면 화가 쌓이면서 어느순간
폭발해서 감당하지 못하거나, 심신에 문제가 되니, 적정선의 감정노출은 필요하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시간을 내서라도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
Administrator only.
이번이 상당히 그렇죠? 놀랄만한 일들이 더 있으나 그건 병원에서 :-)
뭐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화를 내야 정상입니다..
근데 저는 하도 응급실에서 정신없는 것을 많이 봐온 터에.....어지간한 일에는 그리 화를 내지는 않습니다. 그 내과 레지던트선생님도 다른 환자와 다른 일때문에 좀 늦어졌겠죠....저같으면 끝나고 나서 왜 약간 늦었는지에 대한 질문을 한번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제가 인격적으로 더 수양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저역시 다른 일로 바쁜 와중에 환자의 오더를 바로 챙기지 못했다가 상당히 곤란한 지경까지 이른 경우가 왕왕 있기에......
저 역시 중요한걸 놓치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그런걸 생각해보면 저 역시 화를 못 내겠더라구요.. :-)
Administrator on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