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상'과 '진단'은 다릅니다...

2004/12/17 10:57

 

얼마전 자신의 '증상'에 대해서 조리있게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적은 바 있습니다. 그런데 주의할 점은, '증상'과 '진단'은 다릅니다. 의학적인 용어로 환자가 호소하는 증상을 'R.O.S.'라고 합니다. 의사가 환자에게, 머리 아프세요? 지금 배가 아프세요? 설사하셨나요?등의 질문을 하면서 환자의 상태를 파악하는 단계입니다. 이 과정에서 의심되는 부위를 '진찰'을 하게 되고, 증상과 진찰과정을 통해서 의심되는 진단을 머리 속에 떠올릴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병원에 간혹 자신의 증상을 통해 스스로 진단을 내리고 오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를테면 식사후에 자꾸 토를 하니깐 난 지금 체한거 같다, 그러니 토 가라앉게 하는 약을 달라. 명치 끝 부위가 쓰리고 아프니 위염인거 같다, 위염약을 달라. 세상이 이렇게 간단하면 대체 의사가 왜 필요한지 모르겠지만, 실제로는 환자들이 생각하는 것 만큼 세상에는 만만한 병들이 있는건 아닙니다. 별다른 증상없이 자꾸 토해서 검사해보니 뇌경색이 나오는 경우도 있고, 명치부위가 아파서 검사를 해보니 심근경색이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니, 하루에도 몇 차례씩 보곤 합니다.
오늘 새벽 4시쯤 70세 남자 환자가 응급실에 왔습니다. 2주전부터 새벽경에 속이 쓰린 증상이 있었고, 며칠전 개인병원에서 위내시경을 해서 미란성위염을 진단받았다고 했습니다. 명치부위가 쓰리면서 아프고 토한후에 증상이 좀 나아진다며 체한거 같다고 약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의사의 접근 방법은 다릅니다. 체한거면 저도 좋겠지만, 우선은 위염이 새벽에 주로 아프다는 점이 위염의 전형적인 증상과 일치하지 않으며, 70세의 남자, 그리고 10년간 고혈압이 있었고, 명치부위가 아프다면 우선 심근경색의 가능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가능성은 낮지만, 10% 정도에서 심근경색시 가슴이 아닌 배가 아픈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선은 위산분비를 억제하는 약을 시험적으로 주면서 심근경색의 표지가 될수 있는 피검사를 실시했습니다. 심전도는 약간 판독내리기 어려웠구요. 약을 주면서도 환자의 증상이 나아지지 않아 재차 심전도를 시행하자 (심근경색이 의심될때 반복적으로 심전도를 찍는 것은 유용한 방법입니다.) 왜 배가 아픈데 진통제는 안 주고 쓸데없는 검사만 반복하냐고 불만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결과는, 심장근육 손상을 나타내는 검사수치가 정상치의 3배가 넘도록 증가했습니다. 즉, 심근경색으로 진단이 내려졌고, 오늘 응급으로 심혈관조영술을 시행할 예정입니다. 만약 의사가 환자의 증상뿐 아니라 환자 스스로가 주장하는 진단명을 그대로 믿고 의심없이 처방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까지도 가능했으리라 생각됩니다.

병원에 있다보면, 여러 검사를 진행하려 할때, 환자 스스로가 내 증상은 이렇고 그래서 이 병인데 왜 더 다른 검사를 진행하느냐며 거부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증상을 멎게 하는 주사나 한대 놔 주면 되지 - 심지어는 돈 몇 푼 더 벌려고 쓸데없는 검사를 하냐고 말하는 분들도 계시더군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더 말할 필요가 없을듯 합니다. 전문의학교육을 받은 전문인들이 의심되어 하는 검사에 전문지식을 갖지 않는 사람이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거부하는 상황에 대해서는요.
환자 스스로가 진단을 내릴때의 문제는 바로, 이렇게 필요한 검사를 거부하고 최종적으로 자신의 진단을 거부한다는데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의료진이 바른 진단을 내리는 과정을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링겔 하나 놔 주세요' 하는 환자들의 심정, 잘 이해합니다. 저희도 몸이 안 좋으면 가끔씩 포도당 주사를 맞기도 합니다. 의학적으로는 큰 근거가 없고, 저 역시도 그리 좋다고 느끼지는 않지만, 많은 동료들이 말하기로는 체감하는 증상은 많이 좋아진다고 하더군요. 링겔 하나, 체감하는 증상이 좋아진다면 근거없더라도 해가 안되면 얼마든지 놔 드릴 수 있지만, 이런 식으로 '처방'까지 요구하는 분들의 문제는, 대부분의 경우 더 이상의 검사도 거부하고 단지 증상에만 초점을 맞추어 바른 진단이 내려지는 과정을 가질 수 없다는데에 있습니다. 의사가 검사해보고 그냥 별다른 처방없이 그냥 수액만 맞아도 된다고 생각될때, 환자가 요구하면 그렇게 해야지, 다른 의심되는 질병들이 많고 검사를 진행하여 진단을 내리고 그에 맞는 치료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환자가 원하는 대로 약을 줄수는 없습니다.
2004/12/17 10:57 2004/12/17 10:57
by 박성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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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레픽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04/12/17 14:41
    음.. 주위에서 그런 경우를 종종 보았던 기억이 나는군요. 제가 아는 분들 중에 이런 불만을 가지신 분이 있으면 이 내용을 얘기를 해드려야겠어요.
  2. 빛그리미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04/12/18 22:17
    환자가 원하는 대로 약을 주어 환자의 생명이나 건강에 유의한 위해가 생긴다면 그때는 또 의사에게 달려와서 항의 혹은 소송을 할테죠. 내년에 인턴이 되고, 저런 환자들을 보면 울컥할것 같은데, 벌써부터 걱정입니다. 하아...-.-
  3. 김현종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04/12/28 23:24
    박성용 선생이 심전도를 찍어서 내게 보여줬던 덕분에 조기에 발견한 case였죠...lateral lead쪽으로 ST depression 있었던.....Non-ST elevation MI였고....TnT가 0.3정도 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둘이서 가슴을 쓸어내렸던 기억이 나는군요...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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