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2] 김제 아리랑 문학관
2007/02/17 10:43
망해사에서 나와 다음 목적지를 어디로 할까 고민하던 차에도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금강 하구 갈대밭에 가볼까, 군산 시내에 들어가 볼까 하다가, 비오는 날 그 어떤 것도 시원치 않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다 문득 김제 벽골제 근처에 조정래 선생님의 '아리랑 문학관'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내고 그리고 발길을 옮겼다. 고등학생때 선생님의 태백산맥을 읽었던 적이 있고, 이후 아리랑을 읽어 보려다 그 양에 엄두가 나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던 차에, 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김제 평야벌에 문학관이 들어섰다는 얘기를 듣고 언젠가 가 봐야지 했다가 근처에 온 김에 들르기로 마음 먹었다.

무엇보다 내가 이 곳에 반드시 와야 겠다고 마음 먹게 된 것은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이 메모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이곳에 꼭 와야 하는 이유, 그리고 작가가 현존하는 작가 가운데 진정 위대한 분 중 하나라는 수식을 받아야 하는 이유이다.
36년 동안 죽어간 민족의 수가 400만!
2백자 원고지 18,000매를 쓴다 해도
내가 쓸 수 있는 글자 수는
고작 300여만자!
2백자 원고지 18,000매를 쓴다 해도
내가 쓸 수 있는 글자 수는
고작 300여만자!
나는 결코 민족주의자도 아니고, 정의에 늘 불타 민족과 국가를 걱정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 어떤 사람보다도 이기적이고 현실적이라고 비난한다면 그 비난을 변명할 여지가 없는 사람 중 하나이다. 하지만 작가의 노트에서 이런 단상을 보고 어찌 숙연해지지 않을 수 있을까. 과연 이런 사명감을 가지고 대작을 만들어내는 작가가 우리 주위에 또 있을까. 문학의 진정성이 어떻고, 예술의 지향점은 인간이 되어야 한다, 이런 얘기가 말로만 그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육화된 모습을 들어보라면 바로 여기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음에 감사했다.

전시관 내부에 아리랑의 친필 원고를 쌓아 놓은 모습. 성인 키보다 더 높게 쌓여진 원고지를 보면 작가가 한 소설을 위해 들인 노력에 다시 한 번 숙연해질 수 밖에 없다.

원고를 쓰기 위해 전 세계를 돌며 취재한 내용을 담은 수첩. 수첩에 남겨진 그림은 만주 용정에 윤동주 시인이 살던 마을을 답사하고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중국이나 러시아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이렇게 그림을 남겼다.

키 높이 보다 더 높은 원고지 가득 소설을 써 내려가기 위해 사용한 펜들. 작가는 작업의 일관성을 위해 한 가지 펜만을 고집을 했고, 그 펜들을 사용하고 심을 모아 놓았다고 한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예술에 있어 형식이나 표현의 결과물이냐의 문제 있어서 형식이 내용을 지배할 수 있다는, 형식이 작가를 지배할 수 있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확고히 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서예가에게 있어 실제 글을 쓰는 과정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먹을 가는 과정, 붓을 다듬는 과정이다. 단지 결과를 멋드러지게 만드는 것에 있어서는 무엇을 사용한다한들 무슨 상관이겠는가.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한 인간의 자세와 노력이 아닐까.

전시관의 내부 모습.
문학관을 나와서도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었다. 문학관을 돌면서 내내 마음이 무거워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다시 가벼워지는듯 했다. 내가 힘들다고, 버거운 짐을 지고 있다고 엄살을 부린다한들 우리 민족이 겪었을 질곡에 비할바 아닐 것이며, 내가 지금 어떠한 노력을 기울인다고 한들 작가가 한 소설을 쓰기 위해 기울인 헌신에 반의 반이라도 따라갈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하니 모든 것은 배부른 푸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제 아리랑 문학관에는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바친 사람들의 모습이 있었다.

category : Travel
덕분에 방에 편히 앉아서도 좋은 구경하고 간다.
앗, 실시간 리플이네요.. 저도 참소리 박물관 가보고 싶어요 :-) 여름 휴가때 가보려구요.. :-)
허걱! 저희 할머니께서 계신 곳과 아주 가까이 좋은 박물관이 있었네요.
내일 할머니 병문안차 내려갔다 올 예정인데, 들를 시간이 있으려나 모르겠습니다.
시인이 여행가라면 소설가는 건축가 같아요. 치밀한 설계와 치열한 작업속에 세워지는 예술.